코로나 시국에 한국에서 장례식 – 중환자실 입원에서부터 [업데이트 2]

아버지의 중환자실 입원 소식을 접하고 바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작년 11월에 일어난 일이라 자가격리 면제는 없었고 물론 비행기 탑승전 코로나 검사도 없던 시기였다. 공항 근처에 에어비앤비를 통해서 원룸오피스텔을 렌트해 무사히 2주를 마치고 병원에 갔을땐 이미 아버지는 나의 얼굴을 못알아보셨다.

코로나로 인해 병원에서는 환자곁엔 한명만 간병이 가능하였고 간병인을 두고, 가족이 면회를 할땐 간병인의 출입증을 받아서 한사람씩만 면회가 가능하였다. 아버지 친구분들이 방문하셨을땐 아버지를 휠체어에 모시고 내려와 면회를 하셨는데 아버지는 말씀을 못하시는 상태였지만 친구분들을 알아보셨는지 눈가가 이내 촉촉해 지셨다. 꽉다문 입술에 흐느끼는 아버지를 뵈니 평생을 든든한 가족의 수호천사셨는데 나이와 병마가 모든걸 변하게 하니 인생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약 2개월동안 간병인은 세번 바뀌었는데 모두 조선족이었다. 첫 간병인은 아버지가 헛소리를 하시는 상태셨지만 간병인만 보면 두려운 눈으로 간병인을 쳐다보았고 눈을 흘기기도 하셨다. 아무래도 느낌이 안좋은게 큰 덩치의 장정이 아버지를 막대하지 않나 싶은 의심마저 들었다. 본인의 식사, 즉 즉석밥과 반찬도 자주 요구하였고 아버지는 가족의 방문때마다 “도망가!! 얼른!!” 이라고 외치셨다. 몇주뒤 그 간병인은 본인 스스로 그만둔다고 하였고 그 다음분이 왔다.

두번째 간병인은 체구가 작으신 조선족이셨는데 그분이 오고나서 아버지의 얼굴엔 평온함이 보였다. 이분은 간간히 즉석밥만 요구하셨고 반찬은 알아서 사드시는듯 했다. 간병인은 협회(병원과 연계된 곳도 있지만 간병협회가 아주 많다.)에서 파견 보내는 식이고, 우리의 경우 하루 13만원을 일주일 단위로 협회에 송금하였다.

작년에 아버지께서 수술을 받으실땐 10만원이었는데 그당시엔 식사도 혼자 가능하셨고 화장실도 혼자 가실수 있었다. 지금은 간병인이 식사를 먹여드려야하고 누워만 계시니 대소변도 기저귀를 차신 상태에서 돌봐드려야하고, 게다가 식도에 가래가 많이 고여있어 간간이 가래를 호스로 뽑아드려야만 해서 13만원의 가격이면 많이 부담은 되지만 가족이 할수 없는 일인지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간병인비는 일주일에 한번씩 소속 간병인 협회로 돈을 송금하였다.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오신지도 몇주가 지났건만 아버지는 별 차도가 없으셨고 식도에 문제가 있는 상태라 식사가 어려워 간병인의 도움으로 죽이나 과즙 등으로 버티시다 보니 체중이 점점 내려가기 시작했고 다리도 눈에 띄게 가늘어지셨다. 이제는 헛소리도 없으시고 눈만 뜨신 상태에서 짧은 단어 몇마디가 전부셨다.

이 와중에 담당 간호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지금 있는 간병인이 자리를 너무 많이 비우고 담배 냄새가 심한걸로 봐서는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것 같다고 간병인 교체를 요구하였다. 아버지와 잘 맞는 간병인이 왔다고 안심하던 차였는데 어쩔 수 없이 간병인 아저씨께 잘 말씀을 드리고 새로운 간병인을 협회에 요청하였다.

새로운 간병인은 여자분으로 역시 조선족 아주머니셨다. 체구가 작으셨는데 170센티미터에 마른 체구의 아버지를 보고는 덩치가 크신데 돌봐드리기 너무 힘들거 같다는둥 불만을 표출하였고 코로나로 병원출입이 힘든 시기이고 새 간병인 면접도 쉽지가 않은터라 간신히 부탁을 드리고 아버지의 간병일을 돌봐드리게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께서 호흡곤란으로 이상이 있으니 가족분들 모두 오시라는 연락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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